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지 S. 패튼 (문단 편집) === 괄괄한 성격 === 그 더러운 성질머리의 소유자답게 부하들로부터는 [[반어법|매우 두터운 인망]]을 얻었는데, 2차 세계 대전 회고록을 보면 타 부대에서는 존경을, 직속 부하들에게는 미움받은 상관. "꼴도 보기 싫은 [[개새끼|개자식]]이지만 어쨌든 전쟁에서는 늘 승리를 거두게 한다"는 게 부하들의 총평. 그는 전투를 피하는[* 후술되겠지만 이 당시에는 정신병리학의 발전이 아직 충분하지 못했던데다, 패튼 본인도 특유의 마초 기질 때문에 현대 기준에서 보면 명백한 [[PTSD]] 환자조차도 단순한 겁쟁이로 취급했다.] 부하들에게는 인정사정없이 '''군화발로''' 조인트를 까면서 '''내 부대에 너 같은 겁쟁이는 필요 없다! 꺼져 버려!''' 라고 하면서 폭언을 퍼부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반대로, 용감하게 싸워서 큰 전공을 올린 부하들에게는 아낌없이 찬사를 보내면서 그들에게 최대한의 보상을 해줬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는 다혈질이면서 용기와 명예를 중시하는, 사회계급이 아닌 군관으로써 굉장히 [[귀족]]적인 인물이었던 셈. 겁쟁이를 경멸하고 용감한 병사들을 아낌없이 칭찬한 것도 그 때문이었고 부하들을 쉬지 않고 독려한 것도 그가 기갑부대를 현대판 [[기병]]대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패튼의 성향은 훗날 미디어에도 반영되어, [[조지 C. 스콧]] 주연의 전기 영화인 <패튼> (국내명: 패튼 대전차군단)에서는 독일군 정보장교인 슈타이거 소령이 자신의 상관인 [[알프레트 요들]] 상급대장에게 패튼을 평가하면서 "그는 전쟁 역사가이며, 현대에 환생한 기사입니다"라 말했다. 특히, 그는 전투 중에 부상당한 부하들이 입원한 야전병원에 직접 병문안을 가서 자신의 부하들은 물론 다른 부대의 병사들까지 일일이 살펴보면서 격려했다고 한다. '''군 사령관이 직접 그렇게 했다.''' [[군의관]]과 [[미군 군사경찰|헌병]]이야 의전으로 죽어나겠지만, 자연스럽게 그와 비슷한 성향의 부하들은 이 괴짜 사령관을 마음속 깊이 존경하게 되었고, 미 3군은 똘똘 뭉쳐 독일군을 상대로 용명을 떨쳤다. 또한 아이젠하워와 더불어 흑인으로만 이루어진 부대를 차별하지 않았던,[* 다만 우선 흑인은 인종문제 때문에 비전투 병과만 받았고, 처음 흑인 부대를 배속받으면서는 이들이 잘 싸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그래도 해당 부대를 방문해서, '''나는 네놈들의 피부색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다. 난 나치를 잘 박살낼 수 있는 놈들을 원한다''' 라고 연설했다. 당시 미군 내에서의 흑백분리가 없어진 것이 베트남전 당시였던 1960년대 후반인데다가, 사회적으로도 흑인들을 열등한 민족이라고 생각하던 시대였다. 저 정도의 생각을 가졌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시 미군에서 몇 안되는 인종 평등 면모를 보였던 장군이었다. 그것도 남부 상류 집안 출신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의외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당대에 인종평등적인 면모를 보였던 것으로 유명한 인물들 중 상당수가 그냥 철저한 결과지상주의자들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시기의 인물들 중에서. 인종차별적인 면모가 없었던 것으로 유명한 [[커티스 르메이]]와 레오 듀로셔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들이 무슨 성인군자라서 인종차별을 안했던 것이 아니다. 르메이가 흑인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던 이유는 그저 '''안그래도 사람이 모자라는데 일하겠다는 사람을 차버릴 이유는 없어서'''였고, 듀로셔 또한 단지 "[[브루클린 다저스|우리의]] 승리에 도움이 되고 구단이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게 해주니까 [[재키 로빈슨|저 친구]]가 검둥이든 외계인이든 그딴 건 알 바 아니다"라고 일갈했던 것이다. 좀 더 후대인 시대를 다루는 [[히든 피겨스]]와 같은 영화에서도, NASA에서 인종차별을 없앤 이유가 '결국은 업무 효율을 늘리기 위해서였다'라는 식으로 나온다.] 별로 이상할 것도 없다. * 그러나 그 불같은 성격은 끝끝내 문제를 터뜨리고 말았는데, 바로 패튼의 인생에 커다란 오점을 남긴 '''부상병 구타 사건'''이었다.[* 이와는 정반대의 인물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명장인 [[이마무라 히토시]]와 졸장이자 [[임팔 작전]]을 승인한 버마 방면군 사령관으로 유명한 카와베 마사카즈인데 이 사람들은 부하들을 굉장히 사랑했고 이마무라가 전쟁공포증을 앓고 있던 병사를 보더니(일단 겉보기에는 별 상처나 수술 자국도 없는 멀쩡한 병사가 침상에 누워 있었다) "나도 자네처럼 그런 고통을 겪었던 일도 있었지."라며 그 병사를 위로해 주었다.] 시칠리아 공격이 한창이던 1943년 8월 3일, 제15임시병원을 방문하여 병문안을 위해 사병들의 침대를 일일이 돌던 패튼의 눈에 붕대도 감지 않았고 수술 자국도 없는 멀쩡한 몰골의 병사가 침상에 버젓이 누워있던 장면이 들어온 것이다. 계속 부상당한 병사들에 대한 측은감을 표시하던 패튼은 그 병사에게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다. 문제의 부상병은 제1사단 소속으로, 전쟁 전에는 카펫 전문가로 일하던 인디애나 청년이었는데 패튼에게 전쟁공포증을 호소하며 "견디지 못할 것 같습니다."라고 무기력하게 대답했다. 패튼은 이걸 겁쟁이의 비겁한 변명으로 간주했고 격노하여 즉각 장갑 낀 손으로 그의 '''뺨을 후려친 다음에 그를 천막에서 끌어내서 등을 걷어차고'''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이 겁쟁이 새끼야, 네놈은 다시 [[유럽|전선]]으로 보내버릴 줄 알아!"''' * 사실 1차 대전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전쟁공포증이나 [[PTSD]]란 '존재하지 않는' 질병이었다. 지휘관들은 그런 증세를 보이는 이들을 그저 겁쟁이로 취급할 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발발한 뒤로 군의관들은 거듭된 전투로 인해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사라지고 기계처럼 변해가는 군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경악했으며,[* [[황해]] 배우 [[전영록]]이 주연한 [[전쟁영화]] 독불장군에서 [[조선인민군]]들이 국군 간첩이 사로잡히자, 동조자로 몰린 마을 남자들을 [[팬티]]만 입은 벌거벗은 몸으로 끌고와서 총살하는 장면, 인민군 장교가 자신에게 저항하는 국군 간첩을 총살하는 장면을 보면 얼굴이 굳어 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인간으로서의 감정인 측은지심 등이 사라진 채, 아무런 감정없이 사람을 죽이는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 강철구를 연기한 전영록도 전쟁에 대한 공포를 보이다가, 인민군 병사를 칼을 던져 아무렇지 않게 죽이는 장면과 인민군 간호장교를 위협하는 등 비인간화된 모습을 연기한다.] 사방에서 전쟁에 대한 공포로 미쳐버린 군인들이 속출하면서 비로소 진지하게 다뤄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전장공포는 1차 세계 대전 때부터 연합국의 주목을 받았으며, 특히 개전전에 대규모 육군을 보유하지 않아 비숙련 징집병의 비율이 높았던 영국군이 이 문제에 대해 민감했다. 그에 비해 미군은 당시의 영국군과 같은 처지임에도 상대적으로 참전 기간이 짧아 직접적으로 PTSD 문제를 피부로 느끼지 못했고, 다만 동맹국인 영국의 전훈을 이론적으로만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1차 세계 대전 당시엔 '''영국군이 겁쟁이라서 저런 놈들이 많이 나온다'''고 떠벌였을 정도. 그러나 2차 세계 대전 시점이 되면 패튼 같은 행동을 드러내놓고 하는 것은 금기시될 정도까지 인식이 바뀌긴 했다. 그리고 [[장군]]이 [[병사]]를 폭행하는 것은 당시 미국 군법에서도 군법회의에 즉각 회부되어야 할 중죄였다. *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시 8월 10일에 제93 임시병원을 방문한 패튼은 또 다시 (겉보기에는) 멀쩡한 병사가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격노하여 병사에게 [[권총]]을 겨누고 위협하면서 '''겁쟁이는 쏴 죽여야 한다'''고 난동을 부렸으며, 거기다 군의관까지 호출해서 "저 놈 [[군법회의]]에 회부시켜! 내가 직접 [[영창]]에 처넣어 주겠어!"라고 소리친 후 곧장 부대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기자들에게 '''전쟁공포증 같은 것은 다 [[유대인]] 놈들이 지어낸 헛소문이라고 자랑스럽게 떠벌리기까지''' 했다.[* 당시 서양권에서 반유대주의는 어느정도 보편적인 사회부조리였다. 그리고 심리학자로 유명한 프로이트가 유대인이었다.] 이후 그 사실이 곧 연합군 총사령부로 전해지면서 아이젠하워 원수는 패튼의 행동에 분노하였으나, 신뢰하는 부하이자 아끼던 사관학교 선배인 패튼의 구명을 위해 모든 종군기자들에게 정보 관제를 신신당부하는 한편 패튼에게도 그 병사에게 직접 사과를 하라고 명령했다. 이 때문에 패튼은 메시나 점령의 기쁨[* 미국 본국은 대단히 기뻐했고 루스벨트가 직접 패튼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루스벨트의 고문인 해리 홉킨스는 패튼에게 에트나 후작 작위를 수여해야 한다고 농담하기까지 했다.]을 제쳐 두고 문제의 병사들은 물론, 임시병원의 의료진 전원과 제1보병사단 전체에게 사과해야 했다. 당연히 제1보병사단 병사들에게 패튼은 철천지 원수같은 존재였지만, 그래도 병의 신분으로서 상관에게 강력히 항의하거나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의 사과를 조용히 들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기자들도 그저 실수라고 받아들이고 순순히 보도 자제 요청을 받아들였으나, 곧 비슷한 사건이 또 벌어진다. * 이번의 피해자는, [[시칠리아 전투]]의 질척질척한 참호 속에서 [[참호족]]을 얻어 입원 중인 병사였다. 그 역시 당장 겉보기에는 크게 아파 보이지 않는 상태로 입원을 하고 있었기에 어김없이 패튼에게 폭행을 당했다. 그런데 이 병사도 장난이 아닌 게, 적지 않게 분노했는지 자신의 앞을 다시 지나가던 패튼을 향해 '''"저는 1주일 넘게 더럽고 썩어들어가는 망할 전투화를 신은 채로 흙탕물로 가득찬 씨발놈의 참호 속에 처박혀 있었습니다, 장군님."'''이라며 그를 노려보면서 또박또박 쌍욕섞인 말대꾸를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이번에는 분명히 자신이 경솔했음을 깨달은 패튼이 먼저 사과했지만, 이미 그 소식은 미국 전역에 퍼져 공론화된 상황이었고 거기에다가 기자들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이전에는 함구하고 있었던 다른 폭행 사건들까지 몽땅 폭로해 버리고 말았다. 당연히 여론의 반응은 부정적이었고, 전국에서 패튼을 맹렬히 비난하는 기사가 쓰여졌으며 아예 그를 퇴역시키라는 압력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다못해 상술된 PTSD 관련 건은 당시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질병이라 변명의 여지라도 있었지만, [[참호족염]]은 패튼 자신을 포함해서 수많은 1차대전 참전 용사들이 이미 잘 알고 있었으며 참호족염으로 고생했거나 발가락을 잘라야 했던 전상자들도 많았던지라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결국에는 또 다시 아이젠하워가 나서서 간신히 뒷수습을 하였지만, "이제 조지가 또 이런 만행을 저지른다면 '''난 그를 자를 수밖에 없네.''' 나도 언제까지나 뒤치다꺼리를 해 줄 수는 없단 말이야."라며 부관들에게 푸념을 늘어놓을 정도로 정나미가 떨어질 대로 떨어져 버렸다. 추가로 이 사건 때에는 군 경력상으로는 패튼의 아버지나 마찬가지였고, 아직 살아있었던 퍼싱 원수도 공개적으로 패튼을 비난하여 둘이 이후 관계를 끊어버리게 되었다. * 그 후에도 [[이탈리아]] [[시칠리아]] 상륙작전에서 또 한 번 아이젠하워의 뒷목을 잡게 만들었는데, 작전 당시에 예정되었던 두 번째 야간 강하 작전이 해안의 대공포 사수와 해상의 지원 함대에게 제대로 통보가 되지 않아 어마어마한 [[팀킬]]이 벌어진 사건 때문이다. 원래 해당 공수작전에 따르면 2,300명이 강하할 예정이었는데, 이 팀킬로 전사한 사람만 400명, 중경상자까지 포함하면 답이 안 나올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후 강하 작전이 진행되는 시간에는 대공 사격을 금지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여기에는 패튼이 강하 작전에 참여할 82공수사단과 수송기 조종사들에 통보하기를 "만약 지상이나 함정이 포격을 하거든 자신들의 위치와 방향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며, 절대 귀관들을 격추시키려는 것이 아님."이라고 하는 바람에 어느 정도 사건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이 사건을 보고받은 아이젠하워는 격노하여 "책임 소재를 파악하고 귀관이 직접 명확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귀관의 목이 날아갈 것"이라는 투의 전보를 보냈지만,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미군의 삽질에는 아이젠하워의 책임도 큰지라 유야무야 넘어갔다. 사실 보직 해임 시기 아이젠하워는 그를 미국 본토로 전출시키려 했으나 조지 마셜 참모총장이 이를 반대, 결국 1년 가까이를 휘하 부대 하나 없는 장군으로 허송세월해야 했다. 그 사이 자기 부관이었던 브래들리는 중장 진급하여 나중에는 상관으로 모시는 사태마저 벌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